내가 선덕여왕을 보기 시작한 건 아역에서 성인 연기자로 바뀌려던 때였다. 그동안 선덕여왕은 무수한 소문에도 왠지 끌리지 않아서 보지 않았는데, 최근 드라마가 뭐가 있나 훑어보다가 1화에 슬쩍 손을 댄 게 화근이었다고 할까. 역사 왜곡 논란은 제쳐놓고, 재밌잖아-!! 하는 생각에 곧 선덕여왕에 몰입하고 말았으니, 그런데 이게 비극의 시작일 줄 그때는 정녕 알지 못했음이다. 선덕여왕을 보면서 내가 재밌다고 느낀 건 미실을 중심으로 천명-덕만으로 이어지는 대립관계,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궁정 암투(...)가 단연 좋았기 때문이다. 내 취향상 드라마를 보며 스토리 자체에 몰입하는 경우가 아주 드문데, 선덕여왕이 그 드문 경우에 속했다. 그랬기에 난 선덕여왕에 러브 라인은 등장하지 않기를 그리도 바랐으며ㅡ"스토리 빵빵하고 아주 좋아. 제발 러브 라인은 나오지 마. 덕만에게는 미실이 딱 좋다니까. 엉엉엉..."ㅡ결국 유덕 라인의 감정선이 드러나는 장면이 나올 시에는 눈을 돌려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김유신 캐릭터가 싫다거나 유덕 라인을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순전히 러브 라인을 원하지 않았기에. 그런데 그렇게 초지일관 러브 라인을 부정하던 내가 무너지고 마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으니, 진리의 비담은 무서웠다.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얜 뭐야?" 하는 마음이 강했는데, 회를 거듭할수록 점점 비담에게 기울어가는 마음이란... 그리하여 언제부턴가 '비덕비덕'거리며 비덕에 몰입하기 시작, 덕만을 향한 비담의 대사 하나 행동 하나에 울먹거리게 되니, 여심이 달리 여심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며 내 안의 잠자는 멜로가 결국 깨어나고야 말았다. 그래, 이게 바로 비극의 극치인 거였다. 비덕을 비덕이라 부르지 못하는 이 마음, 작가가 알아줄까 연출진이 알아줄까-!! 미실이 빠지고 나면 비담의 난이라는 초강수가 남아있기에 길지 않은 분량, 필시 비담의 캐릭터가 부각될 수밖에 없을 텐데, 왠지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단지 비담을 좋아하고 비덕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얼마나 개연성 있게 그려줄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비덕의 운명은 어차피 비극으로 정해져 있기에 더 그 마음이 애달픈데, 뜬금없는 전개가 나오면 어쩌나.. 그 생각이 자꾸만 드는 건ㅡ솔직히 최근 덕만 공주의 눈물 바람에는 약간 실망했다. 예비 여왕다운 강한 모습, 일종의 애이불비를 보여주길 내심 바랐는데ㅡ나도 어쩔 수가 없다. 비덕 떡밥이 없어도 좋으니 부디 수긍할 수 있는 결말이 나와줬으면 한다. 제발, 태왕사신기처럼 되지 않기를. 시청자는 바보가 아니라고. S 방송국 사이트에 NeTv Free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광고를 보면 무료로 프로그램을 감상할 수 있는 서비스인데 이 광고란 것이 한 편당 무려 열 개라는 거다. 5분에 하나꼴로 광고가 나오는데 이건 무슨 인내심 테스트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이 팬심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무료 감상 리스트에 다시 보고 싶었던 '그 여자'가 있음을 알고는 무한한 인내심을 발휘하여 20부를 다 보게 하였다.
내가 처음 '그 여자'란 드라마를 접한 건 3년 전, 이 드라마가 중반을 넘어섰을 때 재방송을 통해서였다. 도연(정성환 분)이 지수(심혜진 분)와 함께 출장을 떠났다는 사실에 그를 쫓아갔던 세정(오윤아 분)이 두 사람을 아슬아슬하게 놓쳤던 장면. 지수와 세정의 대비되는 시선 아래 아무것도 모른 채 지수를 향해 웃음을 내보이던 도연, 그들의 관계가 호기심을 자극해서 1회부터 감상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 여자'에 홀릭하여 마지막회까지 눈을 떼지 못하고 복습의 복습을 반복하는 무한 팬질을 시작했다. '너무 늦어 아픈 사랑' 지수와 도연을 다시 만나다 12년간 아내로 며느리로 엄마로 평온한 나날을 보내던 지수에게 남편의 바람이라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남편에게 가정으로 돌아오라고 애원을 해도, 남편의 여자를 찾아가 헤어져 달라는 부탁을 해도 돌아오는 건 멸시와 모멸감뿐. 그녀의 인생은 그렇게 처참하게 무너졌다. 그때 지수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상처를 감싸주고 눈물을 받아준 따뜻한 남자, 도연. 그는 우연으로 시작된 지수와의 만남이 인연이 되어 결국 그녀를 가슴에 품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여자 세정. 지수 부부의 이혼은 원치 않는다고 했음에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행동을 저질러 끝내 지수의 가정을 파탄 낸 장본인으로 지수의 남편과 불륜을 저지르는 중에 만나게 된 도연을 사랑하게 되면서 도연과 지수 사이의 인연처럼 지수와 끊어낼 수 없는 연으로 묶이게 된다. "나, 당신을 가슴에 못 묻었어요. 잊지는 못해도 묻을 수는 있을 줄 알았는데, ..... 묻지도 못했어요." 지수에게 상처받고 그녀를 잊고자 미국으로 떠났던 도연이지만 지수와의 재회는 자신이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어머니의 부탁과 마음까지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세정의 약속을 믿고 한 결혼을 후회하게 할 정도로, 그녀를 믿지 못하고 그녀를 더 기다리지 못했음에 자책할 만큼 지수의 존재는 그에게 무거웠다. 드라마 주제곡의 노랫말처럼 잡을 수 있다면 어루만져주고 싶지만 자신의 손에 닿지 않는 지수를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며 사랑을 지우지 못하는, 천생 바보인 남자였다. "왜 그 여자랑 결혼했어요? 아내가 어떤 여자인지 과거가 어떤지, ..... 도연 씨는 알아요?" 처참한 현실 때문에 본의 아니게 도연의 진심을 밟아버려 상처를 줬던 지수는 그날의 상처를 드러내며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는 그의 모습에 서서히 마음을 열게 되지만 그의 아내가 자신의 가정을 파탄 낸 세정이라는 사실에 다시금 그를 외면하고 만다. 그러나 이미 시작된 사랑은 도연처럼 지수도 그를 마음에서 놓아주지 못해서 과거에 흘렸던 눈물과는 또 다른 눈물이 그녀의 가슴에 상처가 되었다. "나 절대로 이혼 안 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그 여자니까, 당신 가슴에 가득 차서 내가 들어갈 틈조차 없게 만들어 지금껏 날 외롭게 한 바로 그 여자니까." 도연을 좇아서 미국까지 간 세정은 마음은 간섭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그와 결혼한다. 사랑이란 감정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지 잘 몰랐기에 그런 조건을 내걸 수 있었던 그녀는 이때까지만 해도 도연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지금껏 뜻대로 되지 않았던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현실은 남편의 가슴을 이미 훔쳐간 여자가 지수라는 진실을 던져줌으로써 그녀가 지난날 지은 죄의 대가를 뼈저리게 치르도록 한다. 지수를 향한 도연의 사랑은 한결같이 따뜻하다. 지수가 힘들거나 아플 때면 그녀 곁에서 힘이 되어주고, 지수가 자신을 외면할 때도 그녀에게 내민 손을 거두지 않는다. 시선 속에 언제나 사랑을 품은 도연이기에 지수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을 연 것이리라. 하지만, 세정에겐 그런 도연의 사랑이 지독한 상처요, 슬픔 밖에는 되지 않았다. 누군가 사랑을 시작할 때,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사랑에 슬퍼한다던가? 세정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몸이지만 도연의 사랑 앞에선 그녀도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과거, 지수가 저 자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망가졌던 것처럼. 요즘 인기리에 방영 중인 '아내의 유혹'을 명품 막장이라고 하더니만, 나도 재밌게 보는 드라마인데 처음 이 드라마를 접하고 '그 여자'가 생각났다. 불륜과 복수라는 진부한 소재부터 피해자와 가해자의 뒤바뀐 입장까지, 두 드라마는 상층하는 면들이 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작위적인 복수로 희열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그저 사람의 감성을 파고드는 드라마다. 도연과 지수의 사랑에 울고 웃으며 얼마나 가슴 시렸는지 모른다. 세정에게 화를 내면서도 지수와 같은 상처를 가지고서야 지수를 이해한 그녀에게 연민도 생겨났다. 그래서 그녀의 당당한 마지막 모습에는 미소가 나왔다. 그리고 도연과 지수의 마지막은.... 나의 꽃 한상경 네가 나의 꽃인 것은 이 세상 다른 꽃보다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네가 나의 꽃인 것은 이 세상 다른 꽃보다 향기로워서가 아니다 네가 나의 꽃인 것은 내 가슴 속에 이미 피어 있기 때문이다 - 드라마 속에서 두 사람이 다녀간 수목원에 나온 시로 지수를 향한 도연의 사랑을 말해준다. ..... 그래, 무슨 말이 필요할까. 지수가 떠날 때 도연이 건넨 말처럼, "지금부터 등 돌리고 가도,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이 자리에서 꼭 만날 사람 같아요." 일뿐. 3년이 지나 다시 만난 도연과 지수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다. 드라마 속에서도, 내 안에서도 아름답도록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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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엘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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