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lley | Egloos | Log-in  
오랜만의 설레는 리뷰입니다, 씨엘 67회
* (65-66회 연재분이 포함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1.

동질(同質)이라는 건 정말 어떤 면에서 상당히 무섭다. 더욱이 그게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한 특별한 경우라면, 단순히 비슷한 인간과의 만남에서 오는 동질감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어 그 마음이 남다르니 말이다. 현 국왕 테나이얼 2세가 제뉴어리를 대하는 모습을 볼 때면 정말 피부로 와 닿는다. 그렇기에, 지금껏 미스 옥타비아를 괴롭히는 악당 이미지가 강한 남자임에도 제뉴어리와의 만남으로 그게 전부가 아님이 여실히 드러나 생각지도 않게 내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한다.

2백여 년 전, 두 가문의 조상이 집안의 수치라고 할만한 사건스캔들을 일으킨 탓에 같은 피가 흐르게 된 그들이 어린 시절부터 '살해'라는 극단적인 공포에 휩싸였던 건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절묘하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죽음의 한가운데에 섰던 그들. 믿음보다는 배신이 더 익숙한 그들. 같은 피가 흐르고 같은 경험을 했다는 건, 오늘날 두 사람의 만남을 위해 준비된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였을까. 테나이얼을 바라보는 제뉴어리에게는 위화감이 없다. 되려 표정없는 테나이얼의 얼굴에서 금방 생각을 읽어낼 정도다. 또한, 도터와 함께할 때처럼 나사 빠진 모습은 아니지만, 적당히 힘을 빼고 현재를 즐길 줄 아는 게 참 보기 좋다. 제뉴어리와 함께인 테나이얼은 사람이 달라 보일 만큼 풀어진 모습이다. 물론 수시로 국왕으로서의 면모ㅡ그 시니컬한 성격이 드러나지만, 그마저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는 많이 다른 게 역시나 그에게 제뉴어리의 존재는 특별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 난 나를 배신하는 인간은 오랜 시간 공들여서 복수해. 흘려듣지 마. "

옥타비아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같은 여자로서 용서할 수 없는 남자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옥타비아의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테나이얼이 죽음의 공포 속에서 지금껏 걸어온 과거를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되기에, 어린 시절, 옥타비아에게 연정을 품었던 순수한 소년이 증오를 안고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는 게 안타깝기만 하다. 제뉴어리를 대하는 테나이얼은 자기 사람에게는 격의 없는, 순수했던 그 옛날의 모습인지라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그런데 남자 둘이서 하는 뱃놀이라니... 이건 완전히 데이트잖아.

사랑의 또 다른 말은 미움 혹은 증오라고 했던가. 연정과 믿음이 한순간에 도려지고 옥타비아에게 버림받은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권력에 눈이 먼 귀족 세력에 살해당하지 않고자 발버둥치는 것. 그리하여, 복수를 꿈꾸는 것. 시작은 같았지만 서로 꿈꾸는 미래는 다른 두 사람, 테나이얼과 제뉴어리. 그 마지막에는 무엇이 그들을 기다릴지는 모르지만, 지금만큼은 옥타비아를 향한 애증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테나이얼에게 제뉴어리가 적게나마 안식처가 된다는 사실이 고맙다.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존재, 자신을 웃게 하는 존재가 옆에 있다는 건 "겪어본 자"만이 아는 기쁨일 테니까.

2.

망자를 거두는 저승의 여왕, 헬가. 첫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은 포스를 풍기며 나타나 억울한 망자의 혼을 달래주는 모습에 열차 강도 두목(씨엘 1권 등장, 제뉴어리에게 반했던 그 남자)에게 "헬가 님, 짱이야. 의뢰비는 내가 받았는데 일은 헬가 님이 다했잖아. 어떡하지? 공물이라도 사다바칠까?"라는 찬사를 듣게 된 그분. 하지만, 흉한 일이 있을 때만 나타난다는 암룡. 그녀가 원래 향하던 발길은 수도인 시에라ㅡ앞으로 그곳에서 벌어질 '어떤' 참사가 저승의 여왕을 부른 것일까.

3.

오래전 유즈 아인이 크로히텐의 명으로 왕가의 보물을 훔쳐 달아나는 데 사용했던 비밀 통로. 시에라의 시계탑과 뉴턴의 시계탑으로 이어지는, 비상시를 위한 왕가의 비밀 통로인 하늘의 길. 향수병을 달래고자 라리에트와 함께 시계탑에 오른 이비엔은 그곳에서 만난 마리온 덕택에 예전 아버지가 걸었던 그 길에 오른다. 허공에 있는 안 보이는 길, 그 위험성에 라리에트는 이비엔을 만류하지만, 누구도 멈출 수 없는 그녀의 향수병ㅡ뉴턴으로 향하는 길은 마리온의 말처럼 "사랑에 빠진 소녀는 자기 마음을 알기 위해 모험을 해야 할 때가 오는 법이지."...

이래서 사람들이 신이 하늘에 살 거라고 믿는구나.

하늘을 필드로 하는 마녀지만 하늘 아래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건 처음인 이비엔. 그녀가 실감한 하늘은 생각보다 훨씬 크고, 생각보다 더 장엄했다. 그러나 낮과 밤이 다른 것처럼 어둠에 물든 하늘은 무게 없는 물속에 잠기는 기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칠흑의 시간은 방향을 잡을 수 없는 공간. 하지만, 그럼에도 수를 놓은 듯 별이 빛나는 아름다운 그곳. 그리고 그 끝에 존재하는 건 언제나 떨칠 수 없는 한 사람. 거짓말처럼 눈앞에 나타난, 하늘 그 자체인 남자.

안식할 수 없는 곳.

존재하는 않는 것.

아름다운 것.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또 다른 이름ㅡ.


향수병을 모두 잊은 듯, 아니, 향수병의 근원인 듯 그녀를 달리게 하는 존재는 달리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뜻하지 않은 만남에 놀라는 것도 잠시, 밤새 걸었을 그녀를 생각하며 그녀의 옷차림을 걱정하는 그의 마음은 또한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이른 새벽, 시계탑의 하늘 아래에서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소소한 대화, 행동 하나하나가 그저 내 마음을 간질거리며 미소 짓게 할 뿐이다. 역시나... 이래서 난 크로이비를 놓을 수가 없다.

.
.
.

예고편에 등장한 이비엔의 부끄부끄 표정. 다음회 예고는 비밀이라는 그녀의 한 마디가 나를 다시 설레게 한다. 크로이비 떡밥이 내려지려나...
by 아르튀르 | 2009/10/28 23:08 | ciel | 덧글(12)
Commented by Gertrude at 2009/10/29 02:39
어머나, 드디어 헬가 님이 나와주신 건가요..
전하는 도대체 무슨 배신을 당했기에 그리 비뚤어지신 걸까요...
단행본파는 그저 웁니다...ㅠㅠ
Commented by 아르튀르 at 2009/10/29 11:24
저승의 여왕이라더니, 정말 그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게 다 이런 이유에서라고 느껴질 만한 등장이었어요. 헬가 님의 다음 행보가 궁금합니다. 전하의 삐뚤어짐은 알고 나니 참 안쓰럽습니다. 본인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제겐 옥타비아를 향한 애증으로 보이는 지라 대체 두 사람의 앞날이 어떨지... 그들의 과거사는 단행본파의 즐거움(이라고 쓰고 괴로움이라 읽는. 그 괴로움을 못 이기고 단행본파와 잡지파를 겸한 저라지요.)으로 남겨두겠습니다.
Commented by 해명군 at 2009/10/29 11:06
근데 그 이비엔이 내려다 본 세상이 어째서인지 제게는
"빗자루를 타고 내려다본 마비노기의 세계"로 보여서 말입니다...?! (끌려간다)

아니, 이비엔이 용선생 만나러 가는건 그야말로 "판타지"라서
환상적이었어요. 이부분만큼은 애니메이션으로 보고싶다는 생각이....
Commented by 아르튀르 at 2009/10/29 11:28
마비노기의 세계로 보이셨나요? 사실 전 '하늘 아래의 세상'보다는 '하늘'에 몰입했던 지라서 다른 느낌을 받았답니다. 넓은 세상이 아기 손발처럼 작게 느껴질 정도로 하늘이 세상을 품었다는 게 장엄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이비엔이 뉴턴으로 향하는 그 길이 어느 때보다 설렜어요. 하늘 그 자체인 남자와 하늘을 필드로 사용하는 마녀가 서로 어떤 마음일지... 왠지 가슴 뭉클하더라고요.
Commented by ranigud at 2009/10/29 12:35
그분이 마비에 정신이 팔려계셔서 아마 그럴지도... ㅇ<-<
Commented by 아르튀르 at 2009/10/29 14:04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습니까?.. 쿨럭...
Commented by 유메 J. at 2009/10/29 22:31
스탠다드는 크로이비이지만
역시 전 테나이얼(님)과 제뉴어리...OTL(어이..)

저만 마비노기가 떠오른게 아니었군요 ㅇㅇ
Commented by 아르튀르 at 2009/11/13 14:51
저도 사실대로 말하자면, 요즘 테나제뉴를 은근히 밀고 있습니다. 쿨럭...
Commented by 지엔 at 2009/10/29 23:01
가끔 씨엘이 한국만화인게 안타까워집니다. 옆나라였다면 애니화는 진즉에 되었을 작품인데..
Commented by 아르튀르 at 2009/11/13 14:52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저 눈물 납니다.
Commented by 어익후 at 2009/10/30 20:05
지엔님께 대공감입니다...솔직히 일본에서 만들었다면
이미 애니화입니다........
Commented by 아르튀르 at 2009/11/13 14:57
애니화는 생각만 해도 두근두근.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 눈물나게 안타깝습니다.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 2006-2009 Delusion Note | Powered by Egloos | Designed by BabyCat * Arthu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