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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카후지] 가면극 (Masque)
" ............... 오늘 밤도 즐거웠어, 쿠니미츠. "

평소와는 달리 정사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침대를 벗어난 후지가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그 행동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했건만, 그가 던진 말은 미묘하게 데즈카의 신경을 자극하며 의구심을 부추겼다. 중학교 시절부터 계속된 짝사랑을 끝내고 일 년 전 품에 안은 소중한 연인은 지금까지 사랑을 확인한 후 저런 식으로 말을 건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홍조를 띤 뺨을 자신의 가슴에 묻으며 '나 행복해'라고 했을 뿐. 뭔가가 어긋났다는 생각에 데즈카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 ......... 무슨 뜻이지? "
" 말 그대로 즐거웠다고. 굉장히 좋았어. "

돌아보며 싱긋 웃어주는 후지의 미소가 해맑았다. 항상 데즈카의 가슴을 뛰게 하는 그 미소였다. 하지만,

" 너와의 마지막 밤이라서 더 그렇게 느꼈나 봐. "

방금까지 신음을 흘리며 자신을 흥분시켰던 사랑스러운 연인은 간데없었다. 오직 자신에게만 보여주던, 천재라는 이름 속에 줄곧 숨겨왔던 귀여운 아이의 모습, 그마저도 거짓이었다고 말하는 듯이 한 마리의 은빛 여우가 교태(嬌態)를 뽐내며 요화(妖花)의 모습을 드러냈다.

" 네 유학 얘기도 오가는 데다가 일 년 동안 즐길 만큼 즐겼으니 이쯤에서 깨끗하게 정리하자. 너도 짝사랑하던 사람을 연인으로 옆에 두고 실컷 안아봤으니 손해를 본 건 없잖아. 안 그래? "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데즈카의 머릿속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달콤한 향기로, 아름다운 풍경으로 가득한 지난 일 년이 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그저 장난감을 갖고 놀듯 유희를 즐기는 누군가의 거짓된 마음이 만든 농간에 불과했다는 지독한 사실. 지금 이 순간 후지가 짓는 미소에 담긴 그 뜻은 데즈카를 지옥의 화염에 던져버릴 정도로 잔인했다.

" 슈스케.... "

떨어지지 않는 데즈카의 입술이 간신히 후지를 불렀다. 거짓말이라고 말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 간절함이 담긴 부름이었다. 하지만 후지는 더욱 깊어진 미소를 흩날리며 데즈카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가 상냥한 목소리로 그의 바람을 송두리째 도려냈다.

" 신데렐라의 마법은 이미 풀렸어, 데.즈.카. "

미련없이 돌아선 후지는 열여덟 살의 어린 대학생이 머물기엔 값비싼 호텔, 금색으로 치장된 객실 문을 열었다. 붉은 카펫과 은은한 불빛이 몽환의 세계로 이끄는 복도에 발을 들여놓고선 고개를 슬쩍 돌려 데즈카에게 시선을 던졌다. 미끈한 상반신을 드러낸 채 움직일 기미 없이 침대 위에 앉아있는 그. 넓은 객실에 덩그러니 홀로 남은 모습이 어쩐지 불쌍해 보였지만, 후지는 개의치 않았다.

" 유학 잘 가. 지금 떠나면 언제 또 만날지 모르겠지만, 친구지간에 헤어지네 마네 하는 인사 따위는 필요 없겠지? "

객실 문이 닫히고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끝까지 제 생각만 하고 떠나버린 후지, 그 짧은 사랑의 인연 앞에 데즈카는 망연자실했다. 그의 귓가엔 후지의 마지막 한마디, 떨치려야 떨칠 수 없는 잔인한 말이 잔상처럼 남아 끊임없이 맴돌았다. さよなら...






가면극 (Masque)

Tezuka Kunimitsu x Fuji Syusuke
2007.11.12 by arthur siyue






' 데즈카가 널 만나고 싶어해. '

후지는 오이시의 그 한마디에 그가 쥐여준 작은 종이, 호텔 이름과 호수가 적힌 쪽지를 들고 무작정 데즈카를 찾아갔다. 지난 6년간 감정을 죽이고 살았건만 언제나 자신을 지배하는 존재, 잊으려 해도 잊지 못하는 '데즈카 쿠니미츠'란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가슴은 세차게 뛰었다. 물론 머리는 돌아서야 한다고, 만나면 안 된다고 계속 소리쳤다. 얼굴을 마주하면 차갑게 내쳤던 그날의 아픔이 고스란히 돌아와 이후 자신의 삶을 또 다른 고통 속으로 밀어넣게 될 테니까.

한번 길든 몸과 마음은 주인의 손길을 받지 못하면 죽어갈 수밖에 없는 것. 그와 헤어진 후로 절실히 느꼈다. 그와의 영원함이 아닌 짧은 해후는 자신을 위협할 치명적인 독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그가 머무는 객실 앞에 서는 순간까지도 이성은 발길을 돌리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만나고 싶었다. 만나서 묻고 싶었다.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는지, 타들어가는 이 심장처럼 그도 자신을 그리워하는지. 소리없는 물음이 되겠지만 그가 알아듣는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답이 될 것이라고.

달칵. 후지가 떨리는 마음을 누르고 여유를 찾을 새도 없이 누군가에 의해 객실의 문이 열렸다. 조금은 말라 보이지만 다부진 체격에 새틴이 어우러진 블랙 정장 슈트가 잘 어울리는, 은테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 데즈카였다.

" 어, 어떻게... "
" 네가 있을 것 같았다. "

흔들림없는 데즈카의 시선이 후지의 심장 깊숙이 박혔다. 변함없이 곧은 눈동자가 과거를 불러들이며 후지의 죽은 감정까지 건드렸다. 하지만 꼭 그만큼 현실을 일깨우는 안타까움이 시리도록 아팠다.

" ...... 뭐야? 유학 가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점술이라도 배운 거야? 도사가 따로 없잖아. 돗자리 펴죠? "

후지는 데즈카의 어깨를 툭 치며 능청을 떨었다. 몸에 밴듯한 자연스러움이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세월의 거리를 단숨에 메우고 들어왔다.

" 인사할 타이밍은 놓쳤지만 그래도 해야겠지? 오랜만이야, 데즈카. 그동안 잘 지냈던 거야? "
" 네 덕분에- "
" 흠.... 어째 말에 가시가 있는데?  "

짐짓 심각한 듯 말을 건네는 후지였지만, 이내 눈을 흘기는 것으로 농담임을 어필하며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처음 호텔에 도착했을 때도 느꼈지만 역시나 호화로웠다. 웬만한 사람은 감히 엄두도 못 낼 만큼 화려함이 묻어나면서도 품격이 느껴지는, 룸의 이름이 왜 'Diamond Suite'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VIP만을 위한 특별한 객실이었다.

" 예전부터 네 머리의 비상함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 성공하긴 했네. 이렇게 호사스러운 호텔에 다 머물고. "

앉으라는 듯 데즈카가 눈짓을 보내자 후지는 선뜻 소파에 몸을 기댔다. 고급 룸이기에 그런지 소파는 아주 편안했다. 마치 사람의 품속에 안기는 것만 같은 그 안락한 느낌이 좋아 후지의 입가엔 미소가 지어졌다. 그 사이 데즈카는 준비해 둔 와인을 꺼내 잔에 따랐다. 그 단순하고 가벼운 몸동작, 하지만 그만이 지닌 깨끗하고 단정한 자태를 보며 후지가 말을 이었다.

" 그런데 왜 집에는 안 들어가는 거야? 너희 가족들, 너 기다리고 있을 거 아냐? "
" 해야 할 일이 있어서. "

데즈카는 짧은 대답과 함께 와인잔을 후지에게 건넸다. 탐스러운 붉은 빛깔을 품은 잔을 받아든 후지는 데즈카의 잔에 살짝 부딪히고는 붉은 빛깔의 유혹에 응답하듯 입술로 가져갔다. 입 안 가득 퍼지는 감미로운 향이 와인의 맛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 귀국하자마자 호텔부터 직행할 일이라면.... 혹시 여자? "

후지의 입매가 슬쩍 올라가는 것이 은근히 도발적이었다. 교묘하게 말꼬리를 잡는 것만 봐도 고의적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데즈카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와인을 마셨다. 자신의 도발에 발끈하지 않는 그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후지는 와인을 마시는 척 고개를 돌리며 의도적으로 둘만 아는 과거의 파편을 끄집어냈다.

" 대답이 없는 거 보니까 정말 그런가 보네? 역시 외국물이 좋긴 좋나 봐. 금욕의 대명사께서 귀국 첫날부터 호텔을 찾고 말이야. 물론 나야 네가 겉보기처럼 금욕적인 남자가 아니란 건 몸소 알고 있지만. "

움찔. 잔을 거머쥔 데즈카의 손ㅡ건장한 남자답지 않게 희고 가늘지만, 그의 이미지엔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손가락이 순간 잔을 움켜잡았다. 얼굴은 무표정으로 일관했지만 그도 아직 후지와의 지난날, 그 쓰린 과거에 얽매여 있는 모양이었다. 후지는 고개를 돌린 상태인지라 데즈카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채지는 못했지만, 마치 보지 않아도 이미 안다는 듯 입가에 도발성 웃음을 매달고 계속 말을 이었다.

" 그런데 너희 어머니는 우실지도 모르겠다. 아들이 이렇게 여색을 밝히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테니까. 아시면 상당히 충격받으.... "

후지의 손에 들린 잔이 갑작스레 허공으로 들렸다. 이에 놀란 후지가 고개를 들자 와인에 젖은 데즈카의 입술이 찾아왔다. 강하게 짓누르며 사정없이 입술을 열어젖히는 격한 키스에 후지는 몸을 뒤척이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미약한 저항은 데즈카의 손에서 잔을 떨어뜨려 그의 손을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결과를 낳을 뿐, 후지에게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자유를 얻은 데즈카의 손이 후지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피부를 쓸어내리는 손끝엔 집요함이 묻어나 몸 구석구석을 놓치지 않았다.

어둠에 물든 하늘이 달을 감추고 테라스 아래로 쏟아지는 시각. 은밀한 시간이 머무는 소파 위에서 후지는 데즈카의 농염한 키스와 애무로 불꽃에 휩싸였다. 하지만 6년간 굳게 닫혔던 육체의 문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그 탓에 데즈카가 성급하게 풀어놓는 욕망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후지는 그의 거침없는 욕망이 무서워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힘겹기만 한 이 순간이 빨리 끝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연방 흘리는 비음 속에 데즈카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쾌락을 달라고 그에게 매달리는, 이율배반적인 자신을 자각하지 못했다.






아침이라고 부르기엔 날은 아직 어두웠다. 시간상으로 봐도 잠자리에 있어야 하지만 데즈카와 후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른 아침을 맞았다. 밤새 뜨거운 정사를 가졌기에 잠이 부족할 법도 하건만 샤워까지 끝내고 말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상태였다. 물론 후지는 데즈카보다 한발 늦게 잠을 깬 탓에 옷을 갈아입는 내내 데즈카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야만 했다. 노골적으로 훑어내리는 끈적거림이 유쾌할 수 없었지만, 그것보다 더 꺼림칙한 것은, 오랜만의 행위에 힘겨워한 자신의 속내를 그가 알아차린 것만 같았다.

" 나를 상대로 네 욕구를 충족시키다니, 어지간히 다급했나 보지? 어쨌든 나도 싫지 않았으니 미안하다는 말은 할 필요 없어. "

몸은 이미 늘어질 대로 늘어져 피로를 호소했지만 후지는 태연한 척을 했다. 그간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았음을 그가 눈치 챘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스스로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 ........ 그렇게 또 돌아설 건가? "

데즈카의 시선은 여전히 후지를 향해 있었다. 그러나 열기에 취해 후지를 갈구하던, 방금까지 끈적이는 눈동자를 지녔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무감각한 표정이었다.

" 그날 말이야? 뭐, 헤어질 때 내가 좀 매정하긴 했지만 사실을 숨길 수는 없잖아. 그리고 그편이 네 머릿속에서 나와의 일을 잊게 하는데 도움이 될 거고. 너란 남자, 완고하고 집요한 만큼 뭔가 계기를 주지 않으면 끝까지 포기를 못 하잖아. "

미안함은 전혀 담지 않은 말투. 항상 제 좋을 대로의 결론.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고, 헤어질 때도 그랬다. 이것이 유일하게 후지가 꾸며내지 않은 모습임을 알지만, 데즈카는 이마저도 거짓이기를 원했다. 솔직함이 담은 뜻은 버림받던 그날과 똑같다는 것을 알기에.

" 그래서 이번에도 즐겼을 뿐이라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그런 말이 하고 싶은 거냐? "
" 데즈카, 알면서 왜 그렇게 묻는 거야. 그거 나쁜 버릇이야. "
" 너는... 여전히 변함이 없는 건가? "
" 사람이 쉽게 변할 것 같아? 절대 아니지. 더욱이 난 변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없어. 지금 이대로가 좋거든. 그러니 이런 쓸데없는 대화는 그만하자. "

소모적인 언쟁이 지겹다는 듯 후지는 뚱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등을 돌렸다.

" 조금이나마 기대했던 내가 우습군. 미안하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다. 두 번 다시 너를 찾지 않을 테니 안심해라. 먼저 나가볼 테니 알아서 가라. "

허탈한 웃음 뒤로 차갑게 말을 끝낸 데즈카는 후지를 부딪히듯 지나갔다. 스치는 옷깃이 남긴 그의 향기에 후지의 가슴이 메여왔다. 이내 철컹거리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후지에게 슬쩍 시선을 던진 데즈카는 6년 전 후지가 했던 그대로, 과거와의 완전한 이별을 뜻하는 인사말을 돌려주었다.

" 신데렐라의 마법은 풀렸다는 걸 이젠 인정하겠다, 후.지. さよなら... "

굳게 문이 닫혔다. 객실에는 싸늘한 정적감만이 감돌았다. 후지는 왼쪽 가슴을 부여잡고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심장이 찢기는 고통에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아니, 소리 내 울 수가 없었다. 이것은 6년 전 그가 느꼈던 감정, 살을 에는 찰나의 슬픔이었다.

" 미안해, 쿠니미츠.... 상처주는 말 밖에 못해서.... 네가 그런 말을 하게 만들어서... 하지만.... 날 곁에 둬서 좋을 거 하나도 없으니까... 너한테 나는 독이니까... 잊어.... 다 잊고 너만을 위해 살아... 괜찮아... 이걸로 된 거야... 난 괜찮아... "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애써 위로해야만 하는 지금 이 순간, 그 마음이 비참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견딜 수 있다고 자신(自信)했는데, 그래서 흐트러진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는데. 버림받는다는 게, 오래전 자신이 그에게 했던 그 말이 이렇게나 지독한 아픔인 줄을 전혀 알지 못했다. 후지는 누구라도 좋으니 이 고통에서 해방시켜주기를, 죽음의 자비를 내려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 ....... 슈스케, 네가 이렇게까지 바보인 줄 몰랐다. "

어깨를 끌어안은 체온과 목에 닿는 입술의 감촉. 그리고 숨결을 타고 흘러나오는 나지막한 음성.

" 그 무엇을 잃어도 너를 잃는 것보단 괴롭고 힘들지 않다는 걸 왜 모르는 거냐? "

드디어 미쳐버린 걸까. 꿈같은 현실 앞에 후지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 네가 날 차갑게 내치고 돌아섰던 그날, 그 아침. 난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느꼈다. 지금껏 그보다 더한 고통을 느낀 적이 없다. 내가 지난 세월을 어떤 심정으로 살았는지, 무슨 마음으로 돌아와 널 다시 품에 안았는지, 너도 모르진 않을 거다. "

6년 전 그에게서 버림받고 떠난 유학길. 삶의 의욕은 전혀 없었다. 죽지 못해 산다는 심정으로 그저 미친 듯이 공부에 매달렸다. 몸이 편하면 어김없이 그가 생각나기에 아르바이트니 뭐니 해서 쉴 새 없이 몸을 혹사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조기 졸업을 하고 취미로 해오던 주식을 직업 삼아 본격적인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집과 회사, 오로지 이 두 곳만을 오가며 살았다. '일 중독'이라고 불릴 만큼 사생활이란 건 없었다. 그렇게 강행한 지 5년째가 되는 어느 날, 육체도 정신도 더는 견뎌내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아직도 살아있다는, 자신은 후지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굴욕적인 패배로 가득한 절망감이었다.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다는 나약함과 당한 만큼 그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복수심이 충돌하며 괴로움 속에서 허우적대는 자신을 구해낸 것은 퇴원한 지 사흘 만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 기막혀하며 혀끝을 차는 오이시였다.

' 데즈카 네 녀석의 미친 행동도 더는 못 참겠고, 후지가 사람을 거부하는 것도 더는 못 보겠다. '

후지가 왜 자신을 버렸는지, 그 후 지금껏 어떻게 살고 있는지, 오이시가 들려주는 진실은 참혹했다.

' 네 어머니가 후지를 찾아왔었어. 찾아온 목적이란 거야 뻔하지만, 그날 후지 많이 울었어. 후지가 얼마나 널 사랑하는지 아는데, 그런 후지가 네 앞길을 막을 수 없다고 나를 붙들고 하소연하는데.... 너와 헤어지고도 마음을 잡지 못해서 두 번이나 자살 시도를 했어. 불행인지 다행인지 두 번 모두 살아났지만, 그 이후로 후지는 사람을 거부해. 그나마 우리와는 만나는 편이지만... 병원에선 대인 기피증에 우울증세까지 있다고 하더라. 지금도 치료를 받고 있지만 낫지를 않아. 네게 알리고 싶었지만 후지가 말렸어. 너를 붙잡을 수 없다고. '

거짓이었다고는 하나 가면을 쓰고 끝까지 자신을 기만한 후지에게 원망과 분노가 치솟았다. 고통뿐인 지난 세월이 억울해 가슴이 무너졌다. 하지만, 살아야 이유, 삶의 목표가 다시 생겼다. 제멋대로 도망가 버린 후지에게 그에 상응하는 벌을 줄 것이다. 꿈속에서도 자유를 주지 않았던 만큼 그간 품어온 욕망을 모조리 풀어낼 것이다. 그리고, 완전히 가질 것이다. 자신 이외엔 누구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자신의 목소리 외엔 무엇도 듣지 못하게 귀를 막아,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가도록 영원히 가둬버릴 것이다.

그 길로 미국 생활을 모두 정리했다. 그간 일본의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기에 새 직장을 얻는 건 쉬웠다. 더욱이 회사에 이익만 가져다준다면 세 살배기 애도 윗사람으로 모실 수 있다는 사장의 철저한 기업가 정신 덕에 자신의 성벽(性癖)은 문제 되지 않았다. 가족들에겐 귀국 사실을 숨겼다. 미리 알린다면 그간의 정황으로 보아 후지부터 몰아세울 것이 분명했다. 가족과의 마찰은 온전히 자신이 감당해야 할 문제, 물론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부터 심한 반발이 예상되지만 상관없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의'가 아닌 '통보'니까.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걸로 끝, 더는 자신의 삶에 끼어들 수 없음이다.

" 이제는 도망가지도, 숨지도 마라. 거짓말도 하지 마라. 고통은 지난 세월만으로도 충분하다. 내 곁에 있어라. 내 옆에서 날 사랑하고, 내 사랑을 느껴라. "

후지는 숨이 막혀왔다. 자신을 끌어안은 데즈카의 품이 따뜻해서, 사랑을 속삭이는 절절한 음성이 안타까워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또다시 고통으로 얼룩질 삶에 한 줄기 빛을 내려준 이름 모를 존재가 고마웠다. 이 순간만으로도 자신은 남은 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네 옆에서 널 사랑하라니.... 하나도 안 웃겨. 엉뚱한 소리는 그만 해. "

데즈카의 팔을 쳐내고 자리에서 일어난 후지는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짓더니 문을 향해 걸어갔다. 흔들리는 발걸음을, 흐느끼는 어깨를 들키지 않도록, 조금씩 눈물이 차오르는 눈동자를 정면에 응시한 채 간밤의 정사로 고통을 호소하는 허리를 곳곳이 세우고서.

" 또다시 날 고통 속으로 밀어넣겠다는 거냐? 날 버리겠다는 거냐? "

단호한 그의 음성이 객실 문을 열려 한 후지를 붙잡았다.

" 만약 이번에도 그럴 생각이라면, 차라리 이 자리에서 날 죽여라. 내 숨통을 끊고 심장을 갈라라. 다시는 널 찾지 못하도록, 네 앞에 나타나지 않도록 확실하게 네 손으로 나를 죽이란 말이다. 그게 내게는 버림받는 것보다 훨씬 자비로운 일이다. "

데즈카는 한마디, 한마디에 애끊는 심정을 담아내며 후지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문고리를 부여잡고 그 작은 어깨로 숨죽여 우는 모습. 자신의 어머니와 만났던 그날에도 말 한마디 못하고 저렇게 울었겠지. 지키지 못한 고운 연인의 서러운 눈물이 데즈카의 심장을 찢었다.

" .......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

후지의 팔을 끌어 자신의 앞에 세웠다. 뺨을 감싸쥐고 얼굴을 들어 올리자 흥건하게 젖은 푸른 눈동자와 꽉 깨문 입술이 괴롭고도 슬픈 마음을 고스란히 전해왔다. 그 마음을 위로하듯 데즈카는 이마에서 코로, 뺨으로 키스를 이어갔다. 유리인형을 만지듯 조심스럽고 애틋한, '사랑한다'는 무언(無言)을 가득 담은 키스가 후지의 거짓된 마음을 녹여내기 시작했다.

" 말해라. 네 안에 담긴 진심, 정말은 하고 싶은 말. 더는 숨기지 말고 내게 말해라. "

마주한 시선에서 열망이 쏟아져 나왔다. 더는 감출 수가 없는 아련한 사랑이 결국 후지의 얼굴에서 가면을 벗겨 내고 감춰둔 진실ㅡ 하냥 보고 싶어 그립다가도 병든 자신이 애처롭고 불쌍해서 눈물로 적신 마음, 언제나 입 안에서 맴돌지만 차마 소리 내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다시금 속삭이게 하였다.

" 사랑해... 사랑해, 쿠니미츠. 지금껏 너 하나만 바라봤어. 줄곧... 줄곧 너 하나만... "

터져버린 감정에 휩싸여 끊임없이 사랑의 말을 전하는 후지를 품에 안은 데즈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6년 만에 다시 찾은 미소- 소중하고 또 소중한 연인이었다.




.......... 이제야 손에 넣었다, 슈스케. 너는 영원히 내 것이다.
by 아르튀르 | 2007/11/12 09:17 | tenipri | 덧글(7)
Commented by 아르튀르 at 2007/11/12 09:24
감상 포인트는 즈카가 미국 생활동안 갈고 닦은,
청산유수한 화술- 버터 바른 대사들입니다. 후다닥~
Commented by 리꾸 at 2007/11/12 10:55
녀석.. 정말 거기서 버터만 먹고 온 것 아닙니까!! 어서 저런 망측한 말을... (← 요즘 사극이 열풍이다보니 저도 모르게 ㅡㅜ) 하지만 후지니까 괜찮아요. 다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후지 마음을 아프게 좀 하지 말란 말이닷!! 아무튼 선물 정말 감사드려요 ^^ 제 사막 같은 일상에 단비를 내려주셔서 정말 감동 입니다 ^^
Commented by 생글이 at 2007/11/12 17:51
하이고, 데즈카 이녀석 굉장히 멋있는 말만 해대다니요!
말하나하나가 가슴에 울립니다요 ♥
이녀석 이렇게 멋져도 되는건가요 ㅠㅠ 무슨말을해도 멋있다니
마구 감동입니다 ㅠㅠ ! 그래서 이 두커플을 마구 좋아하는가 봅니다 저는 ♥
오늘도 좋은글 감동적인글 보고 갑니다! 헤헷 ♥
Commented by 아르튀르 at 2007/11/13 09:58
리꾸님// 그러게요. 즈카한테 김치나 고추장을 먹여서 버터끼를 없애든가 해야지 안 되겠어요. 그런데 저 버터 바른 대사를 마구 날릴 수 있는 게 제 안의 즈카 모습 중 일부인지라 종종 등장할 확률이 높습니다. 어디까지 제가 즈카에게 버터를 먹일지는 모르지만(?) 상대방이 후지니까 무조건 용서하실거라 믿습니다.+_+ <- 어이.;;;;;;;

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다 제 잘못이지요. 안 그래도 지금껏 제가 후지를 많이 괴롭힌 것 같아서 좀 찔렸는데 실은 제 본심은- " 즈카야, 내가 후지를 이렇게나 괴롭히니 가슴이 아프지? 괴롭지? 그러니까 엉뚱한 짓은 그만두고 네거라고 확실히 도장찍고선 옆에 끼고 살란 말이야. ".........라고 할까요? (퍽-) 즈카후지를 향한 제 삐뚤어진 애정관입니다.;;;;;;;
Commented by 아르튀르 at 2007/11/13 10:15
생글이님// 버터 바른 대사를 난발하는 즈카- 전혀 즈카같지 않지만 좋아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대사를 쓸 때 별 생각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쓰는데 원체 즈카 녀석이 멋지다(라고 쓰고 삽질이라고 읽어주는) 보니 그렇게 보이는가 봅니다. (응?) 어쨌든 싫어하는 분은 없는 모양이니 (그래봤자 덧글 남긴 분은 두분이지만 눈팅족들의 무언은 긍정이라고 제맘대로 판단합니다.+_+) 이에 힘입어 대패지참 소설과 함께 버터 소설도 마구 써내도 되겠어요. <-이건 아닌 것 같은데.;;;;;;;;
Commented by Teferry at 2007/11/14 01:22
안녕하세요, 나비스 홈을 통해서 온 테페리라고 합니다.
나비스 홈에 가끔씩 올라오는 아르튀르님의 축전들을 읽으면서 꼭 한 번쯤 홈을 찾아뵙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어째서인지 제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마이너 커플링(운다;;) 즈카후지 신도를 또 한 분 뵙게 된 반가움에 나비스 BBS를 뒤져서 홈을 찾아봤더니 반갑게도 마침 얼음집 가족이시더군요. 제 얼음집도 즈카후지가 한 테마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래서 더더구나 스토킹이 아닌, 수면 위에서 같이 얘기 나눠줄 분이 얼마나 반가운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용기를 내어 인사드려 봅니다. 전 창작은 안 하지만 시간 되실 때 가끔씩 놀러오셔서 같이 놀아주세요. ^^
오른쪽의 링크 프리란 말에 용기를 얻어 링크 업어갑니다. 앞으로도 울 사랑스런 원조부부 이야기 많이 써 주세요. >ㅁ<
Commented by 아르튀르 at 2007/11/15 20:33
어서 오세요, 테페리 님. 나비스 방명을 뒤지는 수고까지 하시다니- 영광입니다. >.<
마이너 커플링, 저도 웁니다.ㅠㅠ 전 정말 메이저인 줄 알고 얼마나 좋아했는데 마이너란 소리에 급좌절...orz 즈카후지만큼 잘 어울리는 커플이 또 어디있다고 마이너랍니까. 더군다나 대세가 후지료- 우리 아가씨를 아들내미랑 엮다니, 용납할 수가 없어요!!!! (후지가 '공'이길 원한다면 후지즈카를 밀어달란 말이야!!!)

스토킹하는 분들께 스토킹은 관두고 저랑 손잡고 오붓이 즈카후지의 꽃을 피우자고 그렇게 노래를 불렀는데 (언제?) 왜 이렇게들 수줍음이 많은지 모습을 드러내는 분이 극소수네요. 그런 제 외로움을 이렇듯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수렁의 원천지 '즈카후지교'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소설을 써낼 것을 모든 즈카후지 신도들 앞에서 맹세하니 <- 뭘 이런 걸 맹세까지.;;;;;; 신도들끼리 뭉쳐봅시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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