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즈카후지] Absolute
뿌옇게 흐린 하늘이 검게 물들었다. 바람에 날리듯 떨어지던 빗방울은 금세 무거워졌다. 세차게 세상을 두드리는 비의 손짓.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고 도로를 한산하게 할 정도로 거침이 없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시원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텁텁한 공기는 마치 여름철 장마처럼 계속 끈적거릴 뿐, 피부로 스며드는 우울함은 바닥을 향해 달음질치기에 충분했다.

딸랑ㅡ.

카페 정문에 달린 작은 종이 울렸다. 손님인 듯한 남자의 뒤를 따라 들어온 장대비 소리가 조용히 흐르는 음악 사이로 요란하게 묻어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툭-툭-. 남자의 코트 자락을 적신 비의 흔적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남자는 코트를 벗어서 걸치듯 왼팔에 올려놓고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금세 찾는 이를 발견했는지 성큼 걸음을 옮기는 모양새가 망설임이 없었다. 남자의 걸음은 창가 왼쪽에 자리한 테이블에서 멈췄다. 상대방은 아직 남자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 향이 피어나는 커피잔을 매만지며 창가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ㅡ여자일까,

아니, 어쩌면 남자일지도ㅡ.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흰 피부가 도드라졌다. 푸르게 빛나되 빠져나간 영혼이 아직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은 눈동자는 초점이 흐렸다. 한쪽 입꼬리가 가늘게 올라간 입술은 웃는 듯 마는 듯 모호했다.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분위기. 그러나 유약하지만 또렷한 존재감. 아름답다, 이 한마디가 통용될 존재.

똑똑ㅡ.

남자가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ㅡ찰나였다.

현실과 경계를 분명히 그어놓았던 눈동자가 생기를 머금은 것은ㅡ.

오랜만의 만남. 인사말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기다렸다는 투정조차도 하지 않았다. 남자를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한없이 푸르렀다. 거짓 없는 미소는 환하게 빛이 났다. 필시 몸에 밴 듯한 부드러움은 누구를 만나도 변함없는 태도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타인과 선을 긋지 않는 순수함 그 자체였다.

『 ... 데즈카. 』

익숙한 듯 기분 좋게 울리는 음성. 이름이 아닌 한낱 성(姓)임에도 부름에 의미가 담기는 것 역시 그 특별한 관계의 증거. 남자는 말이 없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 뒤로 조용히 자리에 앉을 뿐이었다. 하지만 입가에는 이미 미소가 자리했다. 웃는 게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라는, 남자를 향한 보편적인 시각이 머쓱해질 정도였다.









Absolute


1. 완전한, 완벽한

2. [명사 앞에만 씀] (특히 구어체에서 말하는 내용을 강조하여) 완전, 순

3. 확실한, 확고한

4. 제한이 없는, 절대적인, 무소불위의

5. (상대적이 아닌) 절대적인









1.

" .. 정말.. 이상하죠? 나도.. 모르겠어요.. "

학교 안은 조용했다. 서늘한 복도, 빛이 찾아들지 못하는 장소의 음습함은 언제나 그렇듯 조용히 그 자리를 지킬 뿐, 저 멀리 테니스 코트에서 땀 흘리는 사람들과 정문을 가로지르는 학생 몇을 제외한다면 인적조차 드물었다. 내리쬐는 햇살이 지나간 자리에 찾아든 나른한 오후는 그렇게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 .. 왜 갑자기 이누이 상이 생각났는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의 친구인 당신이.. "

창문에 비친 여자의 눈동자는 떨고 있었다. 창가 너머 세상으로 시선을 고정한 것이 분명한데도 바라보는 풍경은 결코 저곳이 아닌 듯. 등 돌린 뒷모습마저 한없이 가련해서 섣불리 말을 건넬 수조차 없는 분위기였다.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찾아왔는지 그녀의 말대로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모른다고 하기에는 이미 많은 걸 아는, 모르는 척하는 게 더 힘이 드는 이누이였다.

" .. 연락도 없이 이렇게 찾아와서 미안해요. 수업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찾아오다니.. 나 참 바보 같죠? "

돌아선 그녀, 아야세는 말갛게 웃었다. 그 웃음이 더 아프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그녀 자신이 아직 제 선택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의미하리라. 이누이는 대답 대신 따뜻한 차 한 잔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익숙하게 코끝을 스치는 향은 필시 라벤더였다. 긴장을 풀고 마음을 편히 가지라는 의미였을까. 조교라는 신분에 걸맞게 매사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남자가 보여주는 무심한 듯한 배려. 아야세는 고마우면서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 두 사람 이야기.. 전해 들었습니다. "

굳이 어떤 이야기인지 입에 담지는 않았다. 좋은 일도 아니고, 그 말을 함으로써 그녀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된다는 걸 알기에 이누이는 말 한마디에도 신중을 기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배려는 이미 필요없는 지도 몰랐다.

" 나.. 잘한 거겠죠?..  이렇게 되는 게.. 맞는 거겠죠? "

기어이 떨어져 뺨을 적시는 눈물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 눈물을 훔쳐내는 손길은 또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스로 선택하고도 그 선택 앞에 여전히 떨고 마는 여자. 이별ㅡ제 손으로 결정지은 그 슬픈 결말을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마냥 아프지 않다고 하기에는 가슴이 너무도 허하고 아린. 연인이 싫어져서 헤어지는 게 아니다. 여전히 그 남자, 후지를 사랑한다. 그렇다고 연인의 마음이 달라져서 이별하는 것도 아니다. 후지 역시 여전히 그녀를 바라본다. 다만, 그게 전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녀가 절감하고 말았다는 것뿐이다. 4년 전, 데즈카의 그녀가 그러했던 것처럼.

" 변명 같겠지만.. 후지는 당신을 좋아했습니다. 사랑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감정이죠. "

" .. 의심하지 않아요. 슈스케는.. 의심할 수가 없어요. "

아야세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누이는 변명이라고 하지만, 절대로 변명이 아니었다. 어떻게 그걸 의심할 수 있을까. 그녀의 연인은 누구보다 상냥했다. 부드러웠다. 그녀의 손을 잡고서 늘 옆에 있어주었다. 종종 내보이는 장난기, 그의 친구들이 고개를 내젓는 심술 앞에서도 그녀에게 보내는 시선은 한없이 자애로웠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으레 생길 수밖에 없는 열정. 푸른 눈동자에 엿보이는 그 마음을 거짓이라고 치부한다면, 그건 그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 행복했어요.. 슈스케와 함께하는 동안, 정말 행복했어요.. 아마도 다시는 이런 사람을 만날 수가 없을 걸요.. "

그럼에도 헤어질 수밖에 없다. 그의 손을 놓아야만 한다. 세상 그 누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단 한 사람만큼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흘려듣듯 언젠가 귓가에 스쳐 갔던 여자. 지금은 어디서 뭘 하는지 소식조차 모른다는, 데즈카의 옛 연인.

" 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나처럼.. 그렇게.. 떠나갔나요? "

이누이는 짐짓 고개를 돌렸다. 딱히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건 아니지만, 대놓고 말하기에는 눈앞의 그녀와 다를 바가 없는 안타까운 사람. 희미해질 때도 됐는데 여전히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이란. 어쩌면 그녀 역시 아야세와 같은 모습으로 이렇듯 자신을 찾아왔던 적이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 ... 아름다운 여자였습니다. 정말로.. "

차라리 별거 아닌 여자였다면 좋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데즈카와는 어울릴 구석이 없는 그런 여자. 헤어진다 하더라도 그저 친구의 여자였다는, 하잘것없는 과거로 남으면 그뿐인 그런 존재. 하지만,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얼굴만큼이나 마음 씀씀이가 아름다웠다. 세심하고 배려심 깊은 성격은 어떤 자리 어떤 상황에서도 모나지 않고 갈무리를 잘해냈다. 누가 봐도 데즈카와 잘 어울리는 여자, 연인 그 자체였다.

" 그 녀석 성격에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를 연인의 자리에 두지는 못합니다. 녀석도.. 후지와 다를 것이 없죠. 그 두 사람.. 그렇게 닮았으니까요. "

4년 전 일을 고스란히 말할 필요는 없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그녀는 알아듣고도 남을 것이다, 이누이는 그리 생각했다. 아야세는 조용히 웃었다. 다 바보 같네요, 우리 모두다. 차향을 음미하던 그녀가 나직히 읊조렸다. 이누이의 생각이 틀리지 않은 순간이었다.


『 ... 나를 좋아하는 건 분명한데, 그걸 아는데도.. 그 사람 마음에 대신할 수 없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연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그런 존재.. 뭐라고 설명해야 하죠?.. 이해하고 싶어도 이해되지가 않아요. 그럴 수가 없어요.. 두 사람의 관계.. 견디기가 어려워요. 이젠.. 자신감이 사라져요.. 왠지, 자꾸만 내가 보잘것없어져요... 나, 이제 어쩌죠? 』


오래전, 애처롭게 고백하던 목소리가 이누이의 귓가에 맴돌았다. 처음부터 알았다, 결국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걸. 오늘, 그리고 4년 전 그날이 아니더라도. 시간을 거슬러 그 옛날, 속내를 알기 어려운 웃는 낯의 후지와 다가가기 어려운 외곬의 데즈카를 친구라는 이름으로 만나게 됐던 그 순간부터. 어쩌면 비약인지는 몰라도, 심적으로는 필경 그러했다.


앞으로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반대로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ㅡ하지만.


라벤더 향이 차츰 잦아들었다. 아야세의 얼굴을 적신 눈물도 흔적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누이는 커피잔을 들었다. 상처가 아물려면 시간이 필요할 테지만, 언젠가 추억으로 남아서 이 자리를 회상하는 그런 날이 올 것이다. 물론 그때까지, 어쩌면 그 이후에도 계속 그녀들에게 미안하겠지.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데즈카 쿠니미츠'와 '후지 슈스케'ㅡ.

두 사람을 아주 오래전부터 지켜봐 온 만큼 그들 사이에 흐르는 특별한 유대감을 잘 안다. 연인, 친구, 그런 형태를 굳이 하지 않아도 좋을. 애초에 성별 같은 건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관계를 구분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구구절절 누군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그간 보고 들은 게 이미 겹겹이 쌓여서 제 안에도 자리했다. 친구를 잘못 사귄 탓이라고 우겨볼까. 이누이는 말없이 웃었다. 아니, 본심을 말하자면,

둘이라서 하나가 되는 그들을 지켜주고 싶은 제 마음에 내리는 벌이라고 해야겠지.


2.


햇살이 설익은 이른 아침, 가족을 뒤로한 채 마주한 두 여인은 누구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할 듯 말 듯 뭔가 타이밍을 재는 것도 같고, 바라지 않았던 이 순간이 왔음에 체념을 한 것도 같은. 그럼에도 마냥 이 자리가 불편하게 여겨지는 것은 아닌 그런 분위기였다. 혈연관계도 아니고 친구 사이도 아닌, 그저 아들의 친구 어머니라는 사실 외에는 그다지 접점도 없는 그녀들이 아침부터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들이 묘하게 닮은 눈빛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에 속하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 .. 시간이 참 빨라요. 그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한 게 엊그제 같은데... "

" 그러게요.. 벌써 그렇게 됐네요.. "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이 흔히 할 법한 인사말로 두 여인, 아야나와 요시코는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롯한 인사말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그녀들이 잘 알았다. 결국 이렇게 됐네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봐요. 나긋나긋, 웃음을 타고 흐르는 그녀들의 목소리에는 빛바랜 시간이 묻어나왔다.

" 그때는 정말 생각도 못했어요. 쿠니미츠가 간간이 입에 담던 아이가 그 애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 어른스러워서 못내 안쓰럽게 하던 아들 녀석이 '후지'를 이야기할 때는 그 또래로 보여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이가 그저 고마웠어요. 정말 그랬는데... "

결국 내 탓이었던 걸까요? 요시코는 아야나가 삼키고만 마지막 한마디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말해서 무엇할까. 어머니라는 같은 입장에서 누구보다 이해되는 심정이었다. 자신 역시 그러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누나와 한 살 아래의 동생 사이에서 자란 탓인지, 품에 끼고 키운 자식임에도 어쩐지 멀게 느껴지던 아들이 '데즈카'라는 이름을 말할 때는 어찌나 살갑게 다가오던지. 반짝이던 그 눈동자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 차라리..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으면..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십 번도 했어요. "

".. 그렇죠. 그럼 대놓고 반대라도 할 수 있으니까요. "

정말 그녀들의 두 아들이 그러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 어머니라는 이름 아래, 세상의 이목에 빗대어 차갑게 아들의 연인을 내치는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식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아니었다. 데즈카도 후지도, 아니었다. 되려 그렇게 바라보는 주위 시선을 이상하다고 여길 뿐, 두 사람은 그들의 관계를 '연인'이라 여기지 않았다. 애초에 '연인'이라고 여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성 간의 끌림이 아닌 순수한 영혼끼리의 만남.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하나가 되는, 그래서 무엇도 대신 할 수 없는 존재.

말로만 들었던 그런 절대적인 한 사람을 두 아들은 만나버린 것이다. 축복인지 불운인지, 고작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마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듯이, 오롯한 신의 안배인 것처럼 그렇게. 그것이 더 무섭다는 걸 그녀들은 지난 세월 동안 뼈저리게 느꼈다. 멀게는 4년 전, 가깝게는 불과 며칠 전. 자신의 아들이 남들처럼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건 헛된 꿈에 불과하리라.

" 그 애들의 관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여자는.. 있을 턱이 없겠죠? "

" 설사 있다 해도.. 이제는 바라지 말아야죠. "

" ... 어쩔 수 없는 부모의 욕심이겠죠. 후후.. 알아요. "

남부러울 것 없는 번듯한 자식들이다. 부모의 콩깍지가 아닌 타인의 시선으로 봐도 어디 하나 빠질 데가 없는 아들들이다. 제 곁에 잘 어울리는 짝이 서준다면 부모로서 이보다 더 좋은 일은 또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걸 포기한다는 건 여전히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어쩌랴. 그녀들이 헛된 꿈을 계속 꾸고자 한다면 남는 건 상처뿐인 것을. 귀하디귀한 내 아들과 그 아들의 친구, 그리고 아들의 연인. 지금까지 만으로도 충분히 상처받고 아파하지 않았던가.


ㅡ모든 걸 손에서 놓아야만 한다.

욕심 한 자락, 미련 한 톨 남기지 않고 오롯하게, 남김 없이.

이젠, 그럴 때가 온 것이다ㅡ.


" 그 녀석들은, 전혀 모르겠죠? 이런 우리 마음을... "

요시코가 슬며시 웃었다. 후지와 똑 닮은 미소가 눈부셨다. 아야나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안다면 아는 대로, 모른다면 모르는 대로. 선문답 같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데즈카의 어머니다운 발언이라고 할까. 잠시 의아해하던 요시코가 금세 손을 내저었다. 마지막까지도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더는 억울해하지도 섭섭해하지도 말자. 그것조차 미련의 일부분. 요시코는 가늘게 잡고 있던 헛된 꿈을 불어오는 바람에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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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만나지는 인연 중에 참 닮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혼이라는 게 있다면 비슷하다 싶은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한 번을 보면 다 알아버리는 그 사람의 속마음과
감추려 하는 아픔과 숨기려 하는 절망까지 다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도 전생에 무언가 하나로 엮어진 게 틀림없어 보이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깜짝깜짝 놀랍기도 하고, 화들짝 반갑기도 하고,
어렴풋이 가슴에 메이기도 한 그런 인연이 살다가 보면 만나지나 봅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속내가 더 닮은,
그래서 더 마음이 가고, 더 마음이 아린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랑하기는 두렵고, 그리워하기에는 목이 메고,
모른 척 지나치기에는 서로에게 할 일이 아닌 것 같고,
마냥 지켜보기에는 그가 너무 안쓰럽고,
보듬어주기에는 서로가 상처받을 것 같고,
그런 하나하나에 마음을 둬야 하는 사람.

그렇게 닮아버린 사람을 살다가 보면 만나지나 봅니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그런 게 인연이지 싶습니다.


『 아마도 그런 게 인연이지 싶습니다 』

  - 배은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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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줄기가 잦아드는가 싶더니 금세 다시 희뿌연 세상을 삼켜버렸다. 변덕스러운 날씨가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기에 남자의 얼굴에는 웃음이 묻어나왔다. 코끝을 스치는 부드러운 향과 입안에서 퍼지는 쌉싸름한 맛의 모순만큼이나 많이도 닮아있었다. 힐끗 올리는 시선 아래 들어오는 한 사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마주친 시선 속에 던지는 상대방의 물음. 왜? 혹은 뭐야? 특유의 장난기를 머금은 푸른 눈동자는 그럼에도 여전히 고혹적이고 아름다웠다.

『 .. 무슨 생각을 했기에 그렇게 웃는 거야? 』

『 ... 후지 슈스케 생각. 』

『 뭐? ... 뭐야?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한 거야! 좋은 말로 할 때 불어~! 』

치켜 올라간 눈매는 흡사 고양이와 같았다. 푸르게 도드라지는 눈동자도 다르지 않았다. 제 곁을 웬만해서는 내주지 않는 혈통 좋은 도도한 고양이ㅡ라고 남자가 입 밖으로 내어 말한다면 필시 그 후환이 두려울 테지만, 나른한 고양이의 갸릉거림이 들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남자에게 특별할 것도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상이었다.

『 .. 아야세는.. 그녀하고는, 연락돼? 』

남자의 입가에서 상냥한 미소가 서서히 흐려졌다. 대화할 때는 항상 눈을 마주하는 게 기본이라고 여기는 사람답지 않게 시선 처리도 불안했다. 꺼내기 힘겨운 말인 듯, 미안함이 잔뜩 묻어나는 그 이름 하나. 모를 리가 없는 남자의 마음 앞에 푸른 눈동자도 초점이 흔들렸다.

『 네 탓 아니야, 데즈카. 』

『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데, 차마 나오지가 않는다. 』

『 그럴 필요 없어. 우리가 헤어진 건.. 아야세하고 나는.. 너도 알잖아? 』

『 .. 후지. 』

남자가 여자를 만난 건 불과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그저 만나달라는 여자의 부탁에 무슨 이유인지도 모른 채 그녀를 맞이했던 일주일 전, 바로 이곳. 공교롭다고 해야 할지,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하염없이 내렸다. 세상의 더러움 따위를 모두 씻어내리는 비를 닮은 듯한 여자의 얼굴. 말 한마디 없이 그저 얼굴을 마주했을 뿐이지만, 남자는 직감하고 말았다. 모든 걸 다 안다고 말하는 눈빛, 부질없는 감정은 이미 내버린 듯한 묘한 모습을 한 여자가 대체 어떤 말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그리고ㅡ이 만남을 끝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에 대해서도.

『 미안해할 필요 없어. 죄책감 같은 것도 갖지 마. 』

그는 슬퍼하지 않았다. 아파하지도 않았다. 연민, 아련, 씁쓸, 공허. 여자를 향한 것인지 어떤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인 채, 다만 조용히 아래로 삭히고 있을 뿐이었다.

『 .. 사실 따지고 든다면, 나도 그랬잖아. 내가 먼저 그랬는걸. 』

그가 먼저 여자에게 이별을 고했다는 뜻일까. 의미가 불확실한 말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이해하고 말 것도 없었다. 모호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지금 어떤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지, 묻는다는 게 더 이상할 일이 될 터. 일주일 전에 남자가 만난 그녀처럼, 4년 전 그날도 그러했다. 부서질 듯한 여린 모습의 여자가 그의 앞에 똑같은 얼굴로 나타났다.

『 아직도 그 일을 잊지 않고 있는 거냐? 』

『 후후.. 데즈카. 』

『 네 잘못이 아니다. 그녀와 나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너도 알 텐데? 』

남자의 미간이 살며시 구겨졌다. 벌써 4년이나 지난 일을 아직도 마음속에 담아뒀다는 사실에, 여전히 그날을 미안해하고 있다는 숨은 마음에. 물론 그녀를 생각하자면 지금도 가슴 한구석이 아렸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만큼 마음에 담을 누군가를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저 아름다운 자수정에 상처 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럴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추호도 없다. 남자가 손을 뻗어 갈색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손동작, 그러나 입을 삐죽 내미는 그가 귀엽다는 듯 그렇게.

『 그러니까 데즈카.. 지금 내가 하는 말이 그 말이잖아. 』

『 .. 아. 』

항의성 짙은 발언에 남자가 탄성 같은 외마디를 뱉어냈다. 바보. 들을 필요도 없이 머릿속에 그 단어 하나가 낭랑한 누군가의 목소리로 떠올랐다.

4년 전 그날ㅡ푸른 눈동자가 보고 듣고 말했던 것들.
그리고, 남자가 보고 듣고 말했던 것들.

4년 후 오늘, 그날의 레플리카ㅡ.

지금 남자는 4년 전의 그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남자가 했던 말을 똑같이 하고 있다. 미안해할 필요 없다는 그의 말에 담긴 진짜 의미가 그제야 비로소 피부로 와 닿는 순간이었다. 남자는 서둘러 손을 거뒀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그의 손길이 분주했다. 얄밉다는 듯 흘기는 눈빛,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뜻은 전혀 달랐다. 남자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이제야 깨달은 사실에 어쩐지 머쓱해지는 기분이었다.

톡ㅡ톡ㅡ.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줄기가 음악 소리를 따라 장단을 맞췄다. 도란도란 이야기꽃이 피어나는 카페 안은 훈훈한 공기가 감돌았다. 남자와 그는 더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같은 취향도 아니면서 묘하게 닮아가는 커피맛을 느끼며 이따금 마주치는 시선, 소리 없이 주고받는 미소가 전부였다.

ㅡ서로 부름에 응답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ㅡ필시 세상 그 어떤 말보다 깊은 의미가 있는 그들만의 언어.

흔히 말하는 연인 사이는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친구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도 없다. 조용히, 나즉이, 내려앉은 오랜 세월 속에 쌓인 그 무엇. 누구보다 저 자신이 알고, 또한 눈앞의 상대방이 모를 리가 없는. 만약 누군가가, 언제부터인지 헤아려볼 수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그저 처음부터였노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그런ㅡ.
by 아르튀르 | 2012/05/05 21:39 | tenipri-shortstory | 덧글(10)
아가씨를 부탁해~!!
오랜만에 글쟁이 모드로 전환하고자 망상가동을 위해서

신 테니프리를 다시 보는 중입니다.

애니프리팀이 투척하는 즈카후지 떡밥은 언제봐도 흐뭇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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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건 크게 보자고요. 클릭하세요.


우리 아가씨, 정말 예쁘잖아요~!!

볼 때마다 예뻐요~!!

이런 아가씨를 두고서 즈카는 어찌 가버릴 수가 있는지.. 앙아앙...

아가씨를 부탁해.. 즈카야 돌아와~!
by 아르튀르 | 2012/05/04 19:51 | chatter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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